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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 최고령 졸업생, 시각장애 1급 김태연 동문(영어교육·16년 졸)

  • 등록일2016.05.02
  • 5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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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최고령으로 이화를 졸업한 김태연 동문(영어교육·16년 졸)은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남들과 같은 20살 때 서울 모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했다가, 오른 눈 시력의 급격한 악화로 학교를 그만둔 이후 20년 동안 어떠한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불가능에 도전한 김 씨는 2012년 마침내 이화여대 영어교육과에 입학, 44살의 나이로 졸업장을 품에 안았다. 2015학년도 전기 최고령 졸업생, 김태연 동문을 이화투데이에서 만나보았다.

1. 먼저, 이화를 졸업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22살 때 당시 센세이션이었던 ‘이보영의 모닝스페셜’을 들으며 영어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이대를 나왔다는 것을 알고 ‘역시 이대는 다르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정말 행복했어요.

졸업하면서 당연히 섭섭하지만 ‘이화’라는 이름을 업고 졸업하기 때문에 아주 좋습니다. 이화는 다니면서도 순간순간이 굉장히 행복했어요. 시원섭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44살의 제 나이대로 살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해요. 많이 배운 만큼, 강력한 무게를 가지고 졸업해서 자신 있게 사회로 나가는 느낌입니다.

2. 21살 당시, 나빠진 시력으로 처음에 입학했던 대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을 때, 눈은 어느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졌었나요?

입시를 위해 유독 열심히 공부한 한 달이 있었는데, 그 날도 공부를 하고 은행에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해를 봤는데 갑자기 번쩍하더니 한쪽 눈의 시야가 까매지더라고요. 사람 얼굴을 보면 검정색으로 보였고요. 병원에서는 한 쪽 눈이 안보이지만 다른 한 쪽은 보이지 않느냐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어요. 그 뒤로 검은 것이 옅어지긴 했지만 망막이 변형됐다고 하더라고요. 겉으로는 티가 잘 안나요.

지금은 눈 안에 렌즈를 삽입하는 수술을 해서, 중심부만 안보이고 주변부는 조금 보여요. 그래도 여전히 사람 얼굴은 원숭이처럼 보이고, 글자도 시력을 잃기 전에 배웠던 한글과 알파벳만 보일 뿐 새로운 글자는 읽지 못합니다.

3. 대학 중퇴 이후 갖은 노력에도 회복되지 않는 시력에 숱한 좌절도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당시 심정이 어떠셨는지, 또 이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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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같은 사람들에게 제가 이 어려움을 극적으로 극복한 방법이나 해답을 주고 싶지만, 저는 그냥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극복이 됐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봤더니 제겐 희망이 있었어요.

20살 때 좋은 시절을 보냈어요. 다같이 MT도 가고 미팅도 많이 했고요. 그러다 2학기가 됐는데 뭘 해도 재미가 없는, 우울증이 왔어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취업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교수님들은 흔히 ‘A폭격기‘라고 하듯이 성적을 매우 잘 주셨죠. 그 당시에는 ’목표가 없는데 왜 공부를 하겠어?‘ 라고 철없이 생각했었어요. 그렇게 우울증을 겪다가 눈이 나빠지니까 목표가 생기더라고요.

병원에서는 3~4년 안에 눈을 아예 못 보게 될 거라고 했는데, 우리 가족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을 안했어요. 의학적으로 고칠 방법이 없다고 하니 자연 치유에 매달렸죠. 그 과정에서 몸이 더 많이 망가졌지만 그래도 늘 긍정적이었어요. 야채주스 두 잔에 쌀가루를 그냥 물에 불려서 마시는 식이요법을 찾아서 해보다가 38kg까지 몸무게가 준적도 있어요. 정말 별별 노력을 다 해봤죠. 부산에 침 잘 놓는 도사님 만나러도 가 봤고요. 몸이 나빠져도 ‘눈이 좋아지는 방법을 아직 못 찾은 거지 나는 찾을 수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봐왔던 친구들이 안 보이고, 백내장 수술도 안 된다는 소식에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떨쳐냈어요. 안 좋은 소식이 있어도 ‘아냐, 나는 다르겠지’ 하고 잘 안 믿었어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희망과 목표를 가졌던 게 제 힘이었어요.

4. 이후 20년 가까이 치료에 매진하다가 다시 수능을 보고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저희 부모님이 제게 지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엄마가 영어 전공이신데, 제가 눈이 나빠지자마자 한의학 배우는 평생 교육원에 가시고, 수지침과 역학도 배우셨어요. 제 눈이 당연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눈이 좋아지게 만드는 방법을 찾으셨죠.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시각장애인이 대학을 못 갔어요. 대학에 장애학생지원센터와 같은 복지를 제공하는 곳이 없었죠. 그래서 저도 당연히 대학엔 못가겠다고 생각하고, 20년 동안 눈이 좋아지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중, 1996년에 대학이 장애인들에게도 지원을 하도록 법이 바뀌었는데, 이 소식을 저는 2010년에 알았어요. 그 뒤로,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고, 그 해 가을부터 준비를 시작했죠. 저는 제 돈을 벌어서 세금을 내는 것이 목표예요. 그래서 일을 하고 싶었어요.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주로 안마, 침술이에요. 아니면 복지관에서 일을 하거나, 공무원이 될 수도 있고요. 저는 공무원, 교사, 변호사 등 공무원 직종 중에 교사를 택해서,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에 들어왔습니다. 이 길을 정말 잘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5. 2012년에 이화여대 영어교육과에 신입생으로 입학하셨습니다. 20살 때는 수의학을 전공하시다가, 영어교육과로 전향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먼저,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을 때, 어학은 눈이 보이지 않아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들으면 되니까. 저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나 옛날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뮬란’, ‘이집트 왕자’ 같은 것들을 귀로 들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또 제가 24살이던 당시에 친구가 없었어요. 남자애들은 군대 갔다 와서 여자친구가 생겼고, 여자애들은 국가고시 등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느라 바빴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옆집 아주머니가 윤선생 영어학원에 취직을 하러 가신다기에 따라갔어요. 그런데 거기에 저도 취직이 된 거예요. 4년 동안 일했는데 그 때 사회생활을 정말 잘했어요. 학생들이랑 30분 넘게 얘기하고 어머니들과도 정말 많이 대화했죠. 어머니들이 제가 신발을 못 찾으면 신발도 찾아주고 그랬어요. 거기서 4년 동안 벌어서 아파트도 샀어요.(웃음) 그 때 ‘내가 가르치는 건 잘하나보다‘ 라고 생각하게 됐죠.

또 저는 영어를 좋아하고 접할 기회도 많았어요. 특히 원어민들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1년 동안 캐나다도 갔다 왔어요. 그 때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죠.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도 필리핀 계 미국인이 룸메이트여서 그 때도 영어를 많이 썼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영어교육과로 진학하는 데에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죠.

6. 입학 후 첫 학기를 보낸 후 학점이 4.3 만점에 4.05, 졸업학점이 4.3 만점에 3.97로 상당히 우수하신데요, 공부하면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수석을 목표로 들어왔어요. 결석을 안 하면 수석을 할 줄 알았죠. 하지만 시대도 바뀌었고 여대이기도 하니까, 모두 결석을 안 하는 건 기본에 학생들이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래도 일단 목표를 잡고 들어왔고, 이때까지 계속 놀았으니 마음을 잡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방학 말고 학기 중에 친구를 만난 적이 5번 정도 밖에 없어요. 그것도 팀플 끝나고 잠깐 만나는 정도였죠. 저는 공부에 주려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공부에 전념했어요. 제가 눈이 나쁘니까 잠은 최소한 8시간은 자려고 했는데, 시험기간에는 8시간을 자고 싶어도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이땐 잠을 안 자고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공부하면서 특히 어려웠던 점은, 어렸을 땐 기억력 하나는 좋아서 한번 들으면 그냥 외워졌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열 번을 들어도 힘들다는 거예요. 나이 탓도 있는 것 같아요. 또 음성으로 들으면서 공부하니까 보통 학생들보다 2~3배의 시간이 걸려요. 그게 좀 힘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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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화여대에서 보낸 4년간의 학부생활 동안 장애학생지원센터가 도움이 됐나요?

네, 공부하는 데 학교가 큰 도움이 됐어요. 교수님께서는 수업하실 때 대명사로 ‘이것’ 또는 ‘저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뭐 도와줄 것 없냐고 항상 물어보셨어요. 저는 책을 메모장 파일로 변환하는 프로그램을 써서 공부했는데, 그 중 변환이 되지 않는 20%는 직접 다 변환해주시기까지 하셨어요. 특수교육과가 있는 서울권 학교는 장애 학생에 대한 지원이 좋은데, 우리 이화여대는 그 둘 모두에 해당되죠. 아마 대한민국에서 장애지원이 잘 되어 있는 학교일 거예요. 이렇게 지원을 많이 해주는데 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했죠. 

8. 앞으로 어떤 교사가 되고 싶으신지 각오가 궁금합니다.

재미있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아이들한테는 수업이 가장 중요한데, 제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개봉동 경인중학교에서는 수준별 수업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특정 과목의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정말 못하죠. 저 역시 학창시절에 ‘물리 포기자’였는데.(웃음) 그런 학생들에게는 재미있게 수업해서 흥미를 이끌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정말 재미있게 하고 싶은데, 지금은 능글맞게 하는 게 생각만큼 잘 안되네요. 학생이 뭐라고 얘기하면 재미있게 받아쳐주고 싶은데, 나이에 안 맞는 개그하면 애들 반응이 싸 할까봐서요. ‘개그콘서트’를 봐야 하나요?(웃음) 또,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일도 잘하고 싶어요.

지금 일하고 있는 학교 자랑 좀 해도 되나요? 저는 경인중학교가 정말 고마워요. 길을 못 찾을까봐 교감선생님께서 직접 데리러 와주신다고도 하고, 가르치는 데 어려움이 생길까봐 팀티칭으로 베테랑 선생님을 한 명 붙여주시기도 했어요. 제 거동이 힘들까봐 저를 위해 영어 교실을 하나 마련해주셔서, 애들이 질문하러 직접 와요. 교장선생님 역시 이틀에 한 번씩 혹시 불편한 건 없는지 계속 물어봐주시죠. 정말 좋아요.

9. 장애를 가진 이화인이나, 이화여대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막상 이화에 들어오니 장애학생이 많지는 않더라고요. 남자가 더 도움을 많이 줄 것 같고, 여자는 좀 이기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서 여대에 부담감을 갖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화여대에 막상 들어오면 사람들도 모두 착하고 이렇게 지원이 잘되는 곳이 없어요. 특히 송민선 교수님이요. 제가 시험 볼 때 장애지원센터에 두 번이나 다녀오시고, 괜찮은지 계속 물어봐주셨어요. 그리고 이화여대는 장애학생이 부탁하면 ‘no’하는 법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서 적극 추천해요.

이화에 입학한 장애학생에게는 크게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먼저, 사회성이 좋아야 해요. 장애인들 중에 사회성 안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좋은 성적이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어느 정도 맞지만, 졸업 후에는 성적이 여러분의 행복을 정하지 않습니다. 타인과의 사회생활은 정말 중요해요. 자기계발서 같은 책을 읽거나 리더십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면서 사회성을 길렀으면 좋겠어요. 두번째는,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해요. ‘저는 아무리 해도 안돼요’ 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해도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기의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노력을 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잘했으면 해요.

장애인들은 분명히 정상인들에 비해서는 부족하고 불편한 게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받는 도움을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불행의 시작인 것 같아요. 내가 조금이라도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남에게 알려주려고 하고,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회에 나갈 준비는 학교에서부터 해야 해요. 공부는 건강을 지키는 선에서, 잘 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화투데이 리포터 오지유(서양화·14), 김태영(경영·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