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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이화인 진로 시리즈 특강 'Break the Frame!' 'Be My Guest' 김아린 대표

  • 등록일2016.01.11
  • 7245

지난 9월, ‘신흥 먹방 요정’ 이원일 셰프를 모시고 진행했던 시리즈 특강 ‘Break the Frame!’을 기억하시나요?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이화인들을 위해 사회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전문가를 모시고 진행하는 2015-2학기 시리즈특강 Break the Frame!의 세 번째 특강이 지난 11월 25일(수), 이화·포스코관에서 진행됐습니다. 이번 학기 마지막 특강의 연사로 나서주신 분은 외식 산업 컨설팅 업체 ‘비 마이 게스트(Be My Guest)’의 대표이신 김아린 동문님이셨는데요, 이화의 선배님께서 강단에 서는 날이라서 그런지 이 날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동안 배운 점을 애정 어린 조언과 함께 아낌없이 쏟아낸 김아린 동문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가보실까요?


‘비 마이 게스트(Be My Guest)’ 회사는


흔히 저희 회사를 소개할 때 ‘청소 빼고 다 한다’고 말해요.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죠. 지금까지 레스토랑 업무를 많이 담당해왔어요. 요즘은 비주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잖아요. 그게 사실 모든 분야에 필요한 요소거든요. 방송, 코스메틱뿐만 아니라 ‘외식’에도 비주얼 디렉팅이 매우 중요하답니다. 마치 기획사에서 신인 아이돌을 준비해 선보이는 것처럼 저희도 다른 기업들의 의뢰를 받으면, 브랜드 콘셉트를 잡고 그 브랜드만의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예원학교, 이화여대 미대를 나와 요리를 시작하기까지


저는 예원학교 그리고 이화여대 미대에서 조소를 전공했어요. 이때까지는 그저 순탄하게 미술을 하는 학생이었기에 큰 꿈이라는 게 없었죠.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아무런 의욕 없이 있으니까, 엄하신 저희 아버지께서 책 10권을 주시더라고요. 10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뒤에 제 진로를 결정해보자고 하셨어요. 당시 아버지께서 주신 책들은 모두 소설도 아닌 너무 어렵고 난해한 책들이었어요.


그 책들을 다 읽고 손으로 독후감을 써내면서 든 생각이 ‘내가 잘 하는 일을 찾아야겠다.’였어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우선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 독후감을 쓰는 동안 외출금지라도 당한 것 마냥 집에서 삼시세끼를 다 직접 해결해야 했거든요. 그때 불현 듯 ‘요리는 내가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 때는 제가 요리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미술을 공부해 왔기 때문에 플레이팅도 잘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예원학교에 미대를 나와 지금까지 진로 걱정을 하지 않던 제가 처음 내린 결정이라서 그런지 아버지께서 선뜻 허락해 주시더라고요. 반대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웃음)


그렇게 요리 쪽으로 저의 진로를 잡고 나서, 저희 부모님이 출장차 프랑스에 가셨었어요. 프랑스의 손꼽히는 유명한 식당에서 일하는 쉐프 세 명에게 딸이 요리공부 할 만한 학교를 물어보니 세 쉐프 모두 한 학교를 추천해주더래요. 그래서 그 학교를 알아보니 대학교를 졸업한 저는 이미 그 학교에 입학하기에 너무 늦었던 거예요. 저처럼 좀 늦게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이 배우는 학교에 가서 요리공부를 시작한 뒤에, 쉐프들이 추천한 그 학교에서 운영하는 대학원 과정의 코스로 진학살 수 있다고 해서 무작정 프랑스 파리로 떠나게 됐어요.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파리로 향했죠. 그렇게 요리를 처음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 하게 된 요리, 쉽지만은 않아...


기초가 너무 없었던 지라 일단 밑바닥부터 무엇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오래된 호텔에 들어가 말단으로 일했어요. 그 때가 두 번째 밀레니엄인 2000년이어서 오페라 광장에 관람차가 다니고 관광객도 사상 초유로 많고 온 세상이 정말 축제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저 혼자 타지에서 처음 하는 요리를 배우고 있자니 서글프기도 했죠. 그 때 제 출근시간이 새벽 4시 반이었어요. 너무 일찍 출근해 저녁이 되면 피곤함에 아무것도 못하고 삶에 좀 지치기도 했죠.


프랑스가 위생관념이 철저한 나라거든요. 요리 초보생으로서 제가 맡은 업무가 식재료 관리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엄격하고 어려워서 힘들더라고요. 그렇게 겨우 겨우 석달을 하다 보니 점차 익숙해지고 노련해지더라고요. 미대를 나왔기 때문에 제가 체력은 좋았거든요. 그러다 또 문득 ‘내가 어느 세월에 요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시작한 프랑스 요리사들에 비해 저는 대학도 이미 졸업했고 나이도 많은 편인데 이제 시작해서 외국인인 내가 어떻게 프랑스 본토 입맛을 따라갈까 싶었죠.


요리사에서 외식 사업으로의 전향


호텔에서는 요리를 만드는 팀과 레스토랑 비즈니스, 연회를 담당하는 팀이 나뉘어져 있어요. 미대를 나와서 손이 빠르고, 여자여서 섬세한 저는 오히려 제가 연회를 담당하는 일을 더 잘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연회 파트로 전향해서 요리 학교 시험을 준비했어요. 당시에 저 말고는 외국인이 없어서 학교생활이 정말 외로웠어요. 지금도 그 학교 외국인 졸업생은 저 이후로 딱 한 명이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운이 좋게도 정말 좋은 교수님을 만났어요. 나이 많은 교수님이셨는데 동양인 여자애가 요리를 처음 한다고 하니 나름 기특하게 여기시고 저를 잘 챙겨주셨거든요. 그 선생님 덕분에 자격증도 취득했고, 지원한 학교에도 붙었어요. 그 당시에는 지원한 학교에 떨어져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두려워서 정말 악착같이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요.


제가 들어간 그 학교에는 6개월 간 학교를 다니고, 6개월 간 원하는 회사에서 근무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어요. 회사와 부서를 골라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각이나 결석을 하게 되면 회사와 학교 모두를 그만둬야 할 정도로 엄격했어요. 그렇게 학교에 다니면서 저는 세 회사를 다녔는데, 마지막 회사는 연회를 가장 잘 하기로 유명한 곳에 지원했어요. 그 회사에서 파티의 컨셉, 플랜을 담당하는 부서에 들어간 게 저에게는 굉장히 좋은 기회였죠. 한국에서 주입식으로 미술을 익혀온 저는 당시에 작품을 보고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을 무척이나 잘해냈고, 그러한 제 능력을 높이 산 상사가 저를 뉴욕 부서로 옮기길 추천했어요. 그렇게 뉴욕에 있는 프랑스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저는 여러 식당의 컨셉을 정하고 관리하는 일을 많이 해보게 됐어요.

 
김아린2

​사진출처: 매일경제


귀국과 결혼, 그리고 브랜딩(Branding)


그렇게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다가, 떠돌이 같은 삶에 싫증이 생기더라고요. 소속감도 느끼지 못했고 이러다가 결혼도 못할까봐 걱정도 됐죠. 그래서 결국 모든 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한국에서 다시 취직을 하려니 아무래도 제 기준이 조금 까다로워졌죠. 결국 일단 조그마한 회사에 취업해서 사업자금을 모으고 직접 사장이 됐어요. 그 후 부터는 정말 물 흐르듯 지금까지 오게 된 거예요.


지금은 한국에서 ‘브런치(Brunch)’에 대한 개념이 대중적이지만, 2004년 즈음에는 브런치가 생소했어요. 그 당시에 우연히 만난 분의 부탁으로 제가 뉴욕에서 살 때의 경험을 살려서 브런치 식당 개업을 도와드린 적이 있었죠. 그런데 아는 기자분이 색다른 소재라며 브런치 문화를 신문에 전면 기사로 내주셨어요. 그 기사 덕분에 제가 도와드린 그 식당이 대박이 났죠.

그 이후로 고객들의 의뢰가 계속 들어오면서, 식당이라는 분야에 집중해 브랜딩을 하고 있어요. 고객들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이미지가 필요한 모든 사업의 브랜딩을 담당하고 있답니다. 사업을 하는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많은 변화가 있는 시기였어요.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어 여러 일과 경험을 거치면서 비로소 ‘나’를 찾고 ‘나’를 만든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이제 내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고 직접 만들어 나가야겠죠.


이화투데이 리포터 김정주(영문·14), 박선정(사학·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