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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 제10회 '아름다운 이화인상'의 주인공, 교육봉사에 헌신해 온 이인숙 동문(초등교육·70년 졸)

  • 등록일201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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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소외된 곳에서 오랫동안 섬김과 나눔의 이화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이화 동문에게 수여되는 상이 있다. ‘아름다운 이화인상‘이 바로 그것. 제10회 아름다운 이화인상의 주인공인 ’덕포진교육박물관‘ 관장 이인숙 동문(초등교육·70년 졸)은 1996년부터 현재까지 옛날 교실로 꾸며진 이 박물관에서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불의의 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되어 교단을 떠나게 된 이인숙 동문을 위해 같은 초등학교 교사였던 남편 김동선 씨는 사재를 털어 덕포진교육박물관을 열었다. 한국의 옛 교육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교실과 책가방, 풍금 등이 빼곡한 박물관에서 이인숙 동문과 남편 김동선 씨는 아이와 어른들을 위해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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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봄날, 덕포진교육박물관에서 만난 이인숙 동문에게는 무한한 ‘긍정 바이러스’가 있음을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시각장애를 딛고 지난 20년간 교육봉사를 통한 헌신을 몸소 실천해온 이인숙 동문과 함께 ‘힐링’의 시간을 가져보자.


Q. 제10회 아름다운 이화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부탁드립니다.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모교가 부족한 저에게 이런 상을 주시니 영광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자신을 사랑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극복해왔는데, 앞으로도 이 긍정 바이러스를 세계만방에 펼치면서 남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Q. 불의의 사고로 40대 중반의 나이에 시력을 잃은 후 좌절의 시기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영혼, 정신이 무너지는 것에 정말 소홀했던 저를 일깨워준 시가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에요. 이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것을’이라는 부분이에요. 우리가 매 순간을 사랑해야하는데 그냥 스쳐가잖아요. 사실 우리에게 모든 순간은 꽃봉오리인데 말이죠. ‘딸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따모아라 늙은 시간은 끊임없이 날으고 오늘 미소짓는 바로 이 꽃도 내일이면 죽으리라’는 문구도 한 시인이 한 말인데, 제가 좋아하는 문구에요. 그 만큼 순간순간이 중요하다는 거죠.

앞이 안 보인다고 내 자신을 손 놓고 버려두지 말고 현실을 긍정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말고 현실을 인정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보자. 그리고 나의 재능을 찾아보자.’라고 생각했죠. 그러다보니 제가 좋아하는 노래 부르기, 시 낭송 등이 떠오르더라고요. 지금 제 나이가 예순 아홉인데 200여편이 넘는 시들을 외웠어요. 이런 노력이면 학위도 금방 따겠죠?(웃음) 제가 영혼을 맑게 하는 동요를 부르고 시를 읊었던 것이 많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비결이었던 것 같아요. 동요 중에서도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이 노래를 부르면 제 마음에 빛이 환하게 비추는 것 같아요. 제가 푸른 하늘, 자연을 보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면 제 마음 속에 아름다운 자연이 보이는 것 같아요.

친구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데 멀리 있지 않아요. 아름다운 노래, 시 등이 저의 비법이라면 비법이죠. 그리고 철학자들의 힘이 되는 말들도 되뇌고 외우면서 고난과 시련을 견뎌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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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배님께서 시력을 잃으신 후 남편이신 김동선 선생님께서 사비로 교육박물관을 열어 평생을 교육 봉사에 헌신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비로 교육박물관을 연다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신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시력을 잃은 후에 음식도 못하고, 돌아다니기만 하면 사고를 치니까 제가 쓸데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더라고요. 그렇게 점점 절망에 빠지면서 제 영혼에 부정적인 생각만 들고 겉모습도 점점 어두워졌어요.

제가 너무 절망에 빠져있으니까 당시에 남편이 저를 잃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대요. 그 때 남편이 교육에 뜻이 있는 제 마음을 헤아려서 교육에 대한 열정을 이어나갈 수 있게 교육박물관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나봐요. 지금 1, 2, 3층 400평 건물에 전시해놓은 물건들을 다 모아놓으면 아주 쓰레기 같거든요. 우이 많은 물건들에는 우리의 얼이 담겨있기 때문에 모아서 후손들을 위한 박물관을 만든다는데 반대할 수가 없더라고요. 교육관도 투철하고 사명감도 있는 사람이니까 믿어봤죠.​

처음에 박물관 짓기 시작할 때는 미친 사람이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사실 저도 의구심이 들었죠. 남편이 고작 전시관 정도 만들까 싶었어요. 이렇게 교실이 만들어질지는 꿈에도 모르고요. 7~8년에 걸쳐 완공된 박물관이 개관하는 날 저더러 풍금을 쳐보래서 제가 버럭 화를 냈어요. 눈이 안 보이는데 치라고 하지 말라고요. 그때만 해도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어서 참 부정적이었어요.

이 박물관에 있는 8,000여개의 물건들이 다 서민들이 애지중지하면서 쓰시던 것들이에요. 우리가 어려운 시절을 이겨냈는데 누군가는 기억해야하지 않겠어요?(웃음) 내년이면 박물관이 개관한지 20년이 되는데요, 그동안 남편이 전국을 다니면서 물건을 일일이 사오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졸업장이나 학교 배지, 통지표들을 직접 기증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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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있는 도시락도 기증받은 것들도 있고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저에겐 이것들이 보물이 된 것 같네요.

Q. 사고 후 마음을 돌이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영혼의 치유사’가 되기로 다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희망을 잃은 이들의 영혼을 어떤 방법으로 위로해주시는지 궁금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저의 존재만으로 희망을 가진대요. 친구가 제가 배웅하는 걸 보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더래요. 여태까지 눈이 보이는 것에 대한 감사를 안 하고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꿈을 잃은 사람들도 눈이 보여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면 뭔들 못하겠어요.

그리고 방문하시는 분들께 시를 들려드리고, 노래를 들려드려요. 문병란 시인의 ‘희망가’라는 시에 ‘꿈꾸는 자여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 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중략)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는 구절이 있어요. 제 거창한 이야기보다 이런 시 구절이 짧고 간결하면서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죠.

‘시인은 연주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 있어요. 연주한다는 게 결국 낭송이거든요. 시를 낭송할 때 목소리나 표정 등을 통해 표현하는 모든 감성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면서 시의 의미를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용기와 꿈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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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교육박물관’이 요즘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편이지만, 처음 세우셨을 당시에는 많은 분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형태의 박물관이었을 것 같은데요. 초기에 박물관 운영이나 홍보와 관련해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2013년 KBS 인간극장에 ‘풍금소리’라는 제목으로 저희 박물관이 방송되면서 많이 알려졌지만 1996년 6월 8일에 개관했을 당시에는 어려움이 많았죠. 이 박물관을 개인이 운영하다 보니 가장 어려운 점은 물건 관리에요. 오래 보존하기가 힘들어요. 물건이 상하지 않게 오래 보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치를 설치하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거든요. 이 물건들이 다 뿌리인데 이걸 없애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것들을 어떻게 보존해야하나 지금도 고민이에요.

Q. 덕포진교육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얻어가길 바라시나요?

감사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고요. 저희 박물관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저를 보고 ‘저렇게 눈이 안보이시는 분도 열심히 살아가는데 나는 뭘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아, 지난번엔 목욕탕에 갔는데 여기가 시골 목욕탕인데도 소문이 났더라고요. 저기 있는 박물관가면 좋은 말씀 들을 수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더라고요. 제가 수업 중간 중간에 우스갯소리를 해주거든요. 예를 들어서 어머니가 와서 우리 애가 0점만 받는다하고 울상을 지으면 “그래도 좋은 건 하나 있어요. 애가 컨닝은 안하잖아요!” 이렇게 조언해주기도 하구요.(웃음) 이런 재밌는 멘트를 중간에 말하거든요.

Q. ‘봉사’라는 말을 왠지 거창하게 들려서인지 저를 포함한 많은 현대인들은 시간이 없고 바쁘다는 핑계로 봉사를 미루기도 합니다. 교육봉사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선배님의 삶에서 ‘봉사’란 어떤 의미인가요?

‘이다음에 돈 많이 벌면 봉사해야지’, ‘힘이 있을 때 봉사해야지’ 하면서 순간순간 놓치죠. 하지만 봉사를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힘이 없어 나약한 친구에게 말로 용기를 주는 것도 봉사에요. ‘지금 하십시오’라는 시도 있거든요. ‘오늘은 하늘이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라는 시 구절에서도 말하듯,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거든요.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게 봉사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조건에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도와줄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는 것이 봉사의 출발이에요. ‘언제라도 해야 할 일이면 지금하고,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면 내가 하자’라는 말이 정말 좋은 멘트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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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배님께서는 이화여대에 다니던 대학시절 어떤 학생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 때부터 교육과 봉사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저는 66학번 초등교육과 전공이거든요. 제가 초등교육과를 택한 건 동심 때문이었어요.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 사는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세계가 너무 좋았어요.

대학 다니던 시절에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어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충당했던 게 생각나네요. 모범생 같이 살긴 했는데, 제 자신에게 제가 엄격해서 좀 피곤하긴 해요.(웃음)

Q. 선배님께 이화란 어떤 의미인가요? 또한, 이화에서 배운 특별한 가치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제가 이화여대에 입학했을 때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일단 너는 선택된 사람이라고요. 그때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죠. ‘진선미(眞善美).’ 진실하면서도 선하고 아름다움을 가져야한다. 미(美)라는 것이 외모가 특출하고 뛰어난 게 아니라 내면이 아름다우면 겉에서도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이화여대에서 또 배운 것은 자부심이에요. 대한민국 최고 여자대학에 다닌다는 자존감과 여성으로서의 올바른 정체성 확립 시켜주는 곳이 이화에요. 제가 이대 출신이라는 게 언제 어디서나 떳떳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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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마지막으로 The Ewha 독자들, 그리고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늘이 CCTV다.’예요. 이 생각을 하면 어느 구석에서도 나쁜 짓을 못하죠. 그리고 끝까지 여자로서 지켜야할 것들은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또,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서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과의 유대관계, 인간관계를 잘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요.

전에 서울대 농대에 입학한 분이 유달영이라는 교수님께서 첫 수업시간에 시를 읊어주셨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어요.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


유달영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
이름없는 들풀로 사라져 버림도
영원에 빛날 삶의 영광도
젊은이의 쓰임새에 달렸으니

오늘도 하루의 큰 뜻을 품고
젊은 하루를 뉘우침없이 살게나

첫 시간에 들은 이 시가 살아가는데 계속 생각나고 가슴에 남았다고 해요. 시는 정말 영향력이 커요.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시 써보기를 추천해요. 하루에 한 개씩 노트에 손글씨로 시를 적어보세요. 스토리텔링이 켜켜이 쌓이면 그게 자신의 보물이 되는 거예요. 한두 명이라도 제 말을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정말 보람차겠네요. 영혼의 기둥이 흔들릴 때 써두었던 것들을 들춰보면 자신에게 정말 큰 힘이 될 거예요.

이화투데이 리포터 최윤영(국제·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