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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과학계] 서울역 노숙인다시서기진료소 최영아 원장(의예과·95년 졸)

  • 등록일2015.03.19
  • 4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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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은 그것의 가장 약한 고리만큼만 강하다’는 말이 있다. 다른 고리가 아무리 건강해도 약한 고리 하나가 끊어지면 전체가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는 어디일까. 많은 전문가들이 노숙인 문제를 그 중 하나로 꼽는다. 거리생활자, 행려자로도 불리는 이들은 극심한 질병과 빈곤, 외로움으로 하루하루 한계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서울역 다시서기진료소 최영아 원장은 의대 예과 2년생이었던 1990년 청량리 청과시장에서 노숙인들을 처음 만났다. ‘밥퍼 나눔운동’ 최일도 목사의 무료 급식소에 설거지 자원봉사를 하러 갔던 그녀는 시장의 진흙바닥에 앉아서 빗물에 밥을 말아먹는 노숙인들을 보고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최일도 목사는 당시의 그녀에 대해 “여느 여대생 같으면 눈을 가리고 피할 험한 노숙인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어루만지면서 따스한 말을 건네는 대학생 시절의 최영아 선생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사진으로 아로새겨져 있다”고 쓰기도 했다. 

 

스무 살의 앳된 의학도가 받았던 당시의 충격은 일시적인 연민으로 그치지 않고 22년의 꾸준한 실천과 헌신으로 이어져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덕분에 대학병원의 고액 스카우트 제의도 흘려보냈고, 전문의가 된 이후 지난 12년 간 월급 100만원도 못 받을 때가 많았지만 “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을 어루만지는” 이 일이 돈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최근엔 ‘마더하우스’(여성 노숙인 지원 쉼터)를 통해 무료 진료를 넘어서 노숙인 자활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는 최영아 원장을 The Ewha가 만났다.

 

 │최영아 서울역 노숙인다시서기센터 진료소 원장은

 

▲ 1995년 이화여대 의예과 졸(89학번) ▲ 2001 전문의(내과) 자격증 취득 ▲ 2002- 2004 다일천사병원(서울 전농동 소재 자선의료기관)  ▲ 2004-2009 요셉의원(서울 영등포동 소재 자선의료기관) 의무원장(06~09) ▲ 2009-현재 서울역 노숙인다시서기진료소 원장 ▲ 한국누가회 상임이사 ▲ 한국YMCA연합회 한국여성지도자상 특별상(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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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최일도 목사는 어떻게 찾아갔나. ‘밥퍼 운동’이 유명하지 않았을 땐데. 


의대 예과 2학년 때 최일도 목사님과 알고 지냈던 교회 선배를 따라 청량리로 자원봉사를 갔다. 당시는 ‘밥퍼 운동’(무의탁 노인, 거리생활자를 위한 무료급식 나눔운동)이 초창기였을 때라 최 목사님이 밥 짓고 설거지까지 혼자 하시던 시절이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의학도였으니 무료 진료를 할 단계는 아니었고 목사님이 밥 지으시는 동안 설거지를 도와드렸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본과 이후부터 다일공동체에서 무료 진료봉사도 하고, 전문의가 되고 나선 다일천사병원 개원부터 참여해서 2004년까지 일했다. 요셉의원 선우경식 원장님과 함께 나를 많이 이끌어주신 고마운 분이다.

 

노숙인을 위한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인생이라는 게 꼭 어떤 대단한 결심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게 아니지 않나.

 

스무 살 때 청량리 시장에서 노숙인들이 빗물 속에 앉아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그들의 삶이 덜 고통스럽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20년이 넘도록 이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지금도 난 ‘평생 노숙인을 위해 살겠소!’ 이렇게 미래를 속단할 생각이 없다. 앞으로도 하루하루 내 감정과 고민에 충실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학생시절의 봉사활동과 전문의가 본업으로 노숙인 진료를 한다는 건 다른 차원일 텐데. 더욱이 상당한 수입이 보장된 대학병원 의사의 길을 놔두고 그 길로 간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다. 특별한 사명감 같은 게 있었나.

 

고민은 오래했다. 본과 때 한국누가회(의료 봉사를 목적으로 모인 크리스천 의료인 공동체) 소속 서울지역 의과대학 친구들이랑 토요일만 운영하는 무료진료소를 열었고, 전문의 따기 전까지 매주 봉사를 나간 기간이 10년이다. 

 

처음에 노숙인들의 혈압을 재고 당뇨 체크하고 과거병력 얘길 듣는 순간 아찔하더라. 혈당, 혈압이 무진장 높은데다 밥이나 약을 언제 먹을지, 술 대신 이것들을 챙겨 먹을지 알 수가 없는 거다. 한마디로 일반인들에 비해 병이 정말 많은데 생활 조절이 전혀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진료하는 입장에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 지 막막했다. 
    
가면 갈수록 마음이 괴롭고 힘들었는데 ‘의사는 가장 병이 많은 곳에 가야한다’는 원칙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생각과 마음을 붙든 일을 전문의가 되고도 계속 하는 게 남다른 사명감인지는 모르겠다. 이 일을 위해 소명이나 부르심을 받았다고도 생각 안 해봤다. 내가 의대생으로서 만난 환자들과의 경험이 가져다 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오랜 거리생활에 지친 환자들이 위협적인 행동을 할 때 치료하는 게 망설여지진 않는지

진료하다가 욕을 먹거나 멱살을 잡히는 일이 예사이긴 하다. 하지만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 사람이 치료해줄 값어치가 있는 사람이냐, 이런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 의사가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환자 잡는 거다.

 

노숙인 중엔 살인범을 비롯해서 온갖 파렴치범들이 섞여 있고, 심지어 살 의사가 없어서 끊임없이 자해행위를 하는 노숙인도 있는데 이 사람들 중 누구를 치료할 것인가는 정답이 없는 논쟁거리다. 그런데 노숙인의 시간은 일반사람들의 시간과 다르다. 노숙인들은 일반인들보다 적게는 5-6배의 병이 있고,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는 시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기 때문에 고민하는 시간에 다 죽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치료할 것인가 말 것이냐 논란이 벌어지는 중에 죽어나간 이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바뀐다. 의사라면 그 어떤 기준보다 병이 중하냐를 먼저 따져야 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견해차가 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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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에 살인까지 해서 청송교도소에서 15년을 복역한 환자가 있었는데 허구한 날 병원 집기를 깨부수고 술주정하고 어떤 날엔 형광등을 깨뜨려 의사 목에 들이댈 정도로 난폭했다. 그 사람을 받아줄 것이냐 두고 직원들 사이에서 논쟁이 격렬했다.

 

난 환자가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병이 심각하고 치료를 통해서 호전될 가능성이 있으면 치료를 해야 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분들은 병원에 못 오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서 각자가 다른 길을 갔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요즘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걸 많이 느낀다. 이 일이 고되고 보상도 스스로의 마음에서 찾는 것이다 보니 조직이 쪼개지기가 너무 쉽다. 가급적이면 한마음 한 뜻으로 서로 감정 안상하게 배려하면서 가려고 노력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유대가 강해야 노숙인들에게도 플러스가 되는 거 같다. 초창기에는 의료인으로서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노숙인들에게 좋은 관계를 만들어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2년 전부터는 ‘마더하우스’ 활동도 같이 하고 있다. 노숙인들의 홀로서기를 위해 전보다 더 넓은 과정에 참여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마더하우스 오기 전에는 진료만 했으니까. 마더하우스는 기본적으로 여성 노숙인을 위한 쉼터지만 일시적으로 비바람을 피하고 진료를 받는 곳을 넘어서 그들에게 관계를 만들어주는 데 주력한다. 현재 잠시 오가는 분이 100명 정도이고 장기적으로 우리랑 관계를 지속하면서 같이 사는 노숙인이 세 분 계신다. 모두 다 미혼모다.

 

그 중 한 분이 보호시설을 나와 노숙하다 아기를 가진 정신분열증 여성인데 이 분 배경이 아주 특이하다. 보통 노숙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경우가 많은데 이 분은 강남에서 잘 나가는 집안 출신이고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집에서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노숙인이 된 경우다.  


이 분의 출산을 위해 이대목동병원에 보냈는데 간호사실에서 난리가 났다. 정신분열 증상 때문에 보호자 없이 간호사실에서 감당할 수가 없다는 거다. 이 분이 모두에게 이상행동을 하는 건 아니고 간호사한테 특히 그런다. 이 분을 병원에 집어넣은 게 어머니인데 어머니 직업이 간호사라 트라우마가 있는 거다. 노숙인 한 분 한 분의 인생사에 이런 관계단절의 드라마들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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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딜레마도 있었다. 정신분열증으로 약물치료를 하고 있는 노숙인에게 아이를 낳게 해도 좋을지, 아기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투약을 중단하더라도 출산 후 아이를 이 노숙인에게 맡길 것인지, 다른 양육기관에 보낼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논쟁거리다. 고민 끝에 결국 산후조리 후에 이 분께 방을 따로 얻어 드리고 마더하우스 멤버들이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지 돌아가며 매일 가서 보며 관계를 만들고 있다.

 

마더하우스에 오는 노숙인 미혼모들을 보면 ‘애가 애를 낳았다’는 말을 실감한다. 본인도 부모에게 마땅히 받아야 될 돌봄이 생략된 아이인데 자기가 돌봐야 할 아이가 생긴 것이다. 우리끼리는 그래서 “큰애를 먼저 돌보자”고 한다. 산모가 건강을 회복하고 정신적, 사회적으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마음을 받아주고 엄마가 되어주는 것이다. 여기엔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 한 2-3년을 그렇게 하니까 한 사람이 변하기 시작하더라.

 

나 역시 가족까지는 못되더라도 저분들의 친척정도의 역할은 해주고 싶다. 노숙인 미혼모 아이의 큰엄마 정도는 되어줘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더하우스의 지난 2년은 내과 의사로서 진료만 하던 지난 8년과는 또 다른 시간이었다.

 

 

그들이 살아갈 희망을 가지기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게 지치거나 힘들진 않나. 또 현실적으로 모든 노숙인에게 가족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전문의가 된 이후 천사병원, 요셉의원, 지금 다시서기센터까지 10년 동안 많은 환자를 봤다. 한두 명도 아니고 하루에 많이 볼 땐 100명씩 진료했는데…다 돌아가셨다.

 

진료가 꼭 필요하지만 현재 방식은 노숙인들을 궁극적으로 살아남게 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되는 거다. ‘영등포 쪽방촌 슈바이처’로 잘 알려진 요셉의원의 故 선우경식 원장님도 이런 한계를 아시고 살아계실 때 시골에서 노숙인 몇 분을 데리고 작은 자활공동체를 꾸리신 적이 있다. 그 대여섯 분이 술 끊고 농사짓고 원장님 일도 돕곤 했는데 결국 그들만 살았다.

 

이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가족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무도 살지 못하는 걸 지켜보지 않았나. 사람은 관계를 통해서만 상처가 회복되지 프로그램도, 돈도, 조직이나 시스템도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마더하우스를 통해 단 한두 분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 노숙인들은 버림받고 술 먹고, 병에 걸리고, 교도소 가고, 나와서 또 세상에 걷어차이고 얻어맞고, 병이 악화돼서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그런 삶을 사는데 일부부터라도 그 악순환을 벗어났으면 하는 거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급할 것도 없다.

 

 

남편이나 아이들도 엄마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지지해주나?

 

남편과는 본과 4학년 때 한국누가회 활동을 같이 하다 만났다. 내가 하는 일을 누구보다 지지해주고 무엇보다 외과의인 남편이 정상적으로 경제생활을 해주고 있어서 돈과 무관하게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일손이 부족할 땐 가끔 직접 진료봉사에 나서기도 한다.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많은 부분을 함께 해 온 고마운 사람이다.

 

아이는 중학생 남자아이, 유치원생 여자 아이, 이렇게 두 명인데 엄마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다. 큰 아이는 다일천사병원에서 크다시피 했는데 노숙인 아저씨들에게 빵이나 용돈을 받는 등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잘 지냈다. 유치원생 딸은 마더하우스에 있는 언니들하고 잘 논다.

 

현재 우리 가족은 마더하우스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마더하우스는 자원봉사자들과 노숙인들이 숙식을 함께 하며 공동체를 이룬 모습인데 같이 지내다보니 어느 쪽이 더 건강한지 모르겠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밥하고 빨래하는 것, 공과금 내는 것 하나하나 익혀야하는데 그걸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있다.

 

 

이 일을 통해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얻는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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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져 삶을 놔버린 사람들을 도와 자활로 이끈다는 게 쉽진 않지만 많은 생각의 기회를 준다. 가족관계, 부부관계, 부모가 된다는 것, 그리고 진짜 의사가 되는 게 뭘까. 노숙인 한분 한분의 삶이 매 순간 그런 걸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엔 생각이 많아져서 고통스럽기도 했는데 단련이 되니까 환자에 의해서 내가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걸 느낀다.

 

나는 원래 가정을 잘 이루려는 열정이나 의지가 부족했던 사람이다. 특히 어렸을 땐 그저 전문의 따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도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가정이 해체되고 버려져서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엄마라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특히 마더하우스 식구들이 살아나는 걸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엄마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옆에 있으면서 작은 일을 계속 같이 해주고, 말을 걸어주고, 밥을 나눠먹는.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 일을 통해서 사람이 살아나더라. 그 별거 아닌 일보다 위대한 일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까 삶이 황폐화되는 건 아닐까.

 

 

최영아 원장에게 이화는 어떤 의미인가?

 

난 금란여중-금란여고-이화여대를 졸업했다. 중·고등학교를 모두 이화여대 부속학교에서 다녔으니 어떻게 보면 이화를 12년 다닌 거나 마찬가지다.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많은 의대생들이 그렇듯이 대학생활의 낭만 만끽할 여유보다는 그저 의사되기를 핵심목표로 공부에 온 힘을 쏟았다. 다만 평생 관계를 맺을 소중한 사람들과 만난 곳이고 한국누가회 활동을 통해 봉사활동을 한 기억이 아름답게 남아있다.

 

졸업 후 이 일을 하면서 이화를 다시 생각하게 된 건 환자들 때문인데 위급한 노숙인 환자들을 받아주는 대학은 이대 목동병원 뿐이었다. 사실 노숙자증으로 갈 수 있는 데는 기껏해야 국립병원, 2차 병원 수준이다. 대학병원 같은 3차 병원 진료가 필요한 경우 마땅히 보내기가 쉽지 않은데 이대병원에서 그런 만남을 기꺼이 맞아주고 병원 스텝들도 환자들에게 따뜻하게 잘 대해주었다. 내가 동문이어서 잘해주었다기보다는 아프고 소외된 사람에 대한 공감이나 책임감이 이화 고유의 정서를 형성하고 있다고 느꼈다. 환자들을 돌보는 입장에서 많이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후배들이 모두 여자니까 마더하우스에서 느낀 점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쌓고 실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엄마의 역할, 스스로 가진 모성을 거추장스럽게 느끼고 함부로 여기기 쉽다. 나 역시 의사로서 인정받기 위해 엄마가 되는 것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모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을 다 버려야할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프고 절망적인 사람들인 노숙인들을 20여 년간 지켜보면서 엄마 되기, 모성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꿈을 위해 쏟는 정성만큼 자기안의 모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면 한다.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 길러서 한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엿한 성인으로 길러낸다는 건 이 세상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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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회가 모성을 지켜주기 위해 제도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배려해줘야 되는 부분 분명히 있지만 여성 스스로도 모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겠다. 밖에서 여건이 안 받쳐준다고 포기하지 말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지난 2-3년의 시간이 그렇게 경시했던 여성, 모성의 값어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새해에도 나에게 주어진 엄마의 역할과 의사의 역할, 기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역할들을 차곡차곡 해나가고 싶다. 일 중심이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여차하면 성취에 대한 압박감 속에 살기 쉬운 각박한 현실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잘 만나는 그런 매일을 살겠다.   

 

 

│글·편집 이화여대 홍보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