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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이준열사기념관 송창주 관장(가정학과·62년졸) N

  • 등록일202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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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고 여성상으로 꼽히는 유관순상 올해 수상자로 송창주 이준열사기념관장이 선정됐습니다. 3·1 운동 당시 17세의 나이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국가와 사회 발전에 헌신한 여성 또는 여성단체에 주는 상인데요,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열사기념관을 설립하고 1995년 8월부터 30년간 운영해 온 송창주 동문(문리대 가정학과 1962졸, 대학원 가정학과 1964졸)의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 



Q. 유관순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상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을 받으면 상당한 부담을 안기기 때문에 저는 상을 받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상을 통해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겠다는 기대로 수락하게 됐어요. 역사는 단지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역사를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홍보 차원에서 이번 수상이 의미와 효과가 참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하면서 한 마지막 말이 “조국을 위하여 바칠 생명이 이 몸 하나밖에 없는 것이 한이로구나.”입니다. 제가 이화여고에 재학하던 시절, 유관순과 동기이셨던 서명학 선생님(후에 이화여고 9대 교장)이 늘 주시던 말씀 덕분에 ‘조국’과 ‘애국’이라는 단어가 저에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소위 세계화의 물결로 인해 이제는 희미해진 말들이지요. 유관순의 마지막 언어가 역사의 메아리가 되어 우리들의 잠자던 국가 의식을 깨워주기를 소망합니다. 



Q. 이준 열사가 돌아가신 헤이그의 ‘드용 호텔’을 사재로 매입해 기념관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는지, 또 설립 과정 중에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저는 정부 차원에서 세운 수출무역회사에 파견된 남편과 함께 1972년 네덜란드에 갔습니다. 이준열사기념관을 설립한 결정적 계기가 된 건,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2년 7월 14일 NRC라는 네덜란드의 권위 있는 일간지에 실린 한 아티클이었어요. 7월 14일은 이준 열사가 헤이그의 ‘드용 호텔’에서 순국한 날이기도 하죠. 역사학도이자 프리랜서 기고가인 네덜란드 여성이 이준 열사에 대한 글을 신문에 기고했는데, 글을 쓰게 된 계기가 흥미로웠습니다. 일본 출장 중에 만난 한 한국 여학생을 통해 이준 열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한국 대사관을 방문하고 묘적지를 답사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된 거죠. 그 기사에서 이준 열사가 머물렀던 호텔의 주소가 언급됐고, 바로 다음 날 찾아갔습니다. 1층에는 당구장이 들어서 있었고, 2~3층은 거의 쓰레기 방으로 방치된 상태였어요. 세 명의 크라컬들이 윗 층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1층은 큰 당구장이 있었지요. 세입자의 우선권을 보장하는 법 규정으로 인해 건물 구입이 어려운 중, 당시 법학 박사였던 헤이그 시장이 ‘시장 직권’으로 호텔 건물을 매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어서 우여곡절 끝에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현 이준열사기념관 은인이 당시 시장입니다. 


Q. 기념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단연코 ‘역사적 사실’입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은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1907년 이후 1954년까지 이준 열사의 묘소를 찾은 한국인에 대한 기록은 없었어요. 1954년 해운공사 배가 로테르담 항구에 정박하고 전원이 처음 방문했고, 1955년엔 훗날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뮌헨 유학생 고병익 청년이 먼 길을 찾아와 헌화를 한 사진이 있습니다. 그 후로 저희가 1991년에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 추모식을 처음으로 드리게 되었을 때까지도 역사 기록을 찾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1907년 이후 저희가 역사적 자료들을 발굴하기 시작한 1991년까지 무려 84년 동안 이 역사 자료들이 방치되어 있었던 겁니다. 

1991년 첫 추모 예배를 드리면서 당시 박윤행 파리 KBS 특파원에게 취재를 요청하는 연락을 했는데, 전화를 받자 대뜸 기자가 저에게 “이준 열사가 기차로 왔습니까? 배로 왔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그때 아차 했습니다. 저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날로 문서보관소를 찾아다니며 사료를 수집했고, 역사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 일의 핵심은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고, 다음 세대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Q. 매년 11월 진행되고 있는 ‘잊지말자 을사늑약(Never Forget Never Again)’ 캠페인의 발원지가 네덜란드 헤이그라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이 캠페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의미는 무엇인가요? 

“잊지말자 을사늑약” 캠페인은 2012년 을사늑약 체결 107주년을 맞아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캠페인을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오늘날 한반도 문제의 뿌리인 을사늑약의 의미를 점점 잊어가는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둘째,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려는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을사늑약은 1905년 일본이 한국의 동의 없이 강제로 체결한 불법 조약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외교권을 상실했죠. 이 늑약의 불법성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하다가 1907년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순국했고, 해방 후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극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어요. 일본에 의해 계속되는 역사왜곡, 종군위안부 문제, 남북분단, 6.25 전쟁, 독도문제, 전세계에 흩어진 탈북자 문제, 북핵 문제 등의 뿌리가 바로 이 을사늑약입니다. 

매년 11월이 되면, 저희 기념관에 방문하는 모든 분들에게 ‘에델바이스 배지’와 함께 을사늑약 5개 조항을 인쇄해 나눠드리면서 캠페인을 펼칩니다. 더 이상의 나쁜 역사가 생기지 않으려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Q. 네덜란드에 첫 한글학교 ‘화란한인학교(現 암스테르담 한글학교)’를 설립하신 것도 큰 업적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셨나요?
 암스테르담 한글학교는 1993년 3월 13일 정식 개교했지만, 저희가 네덜란드에 왔던 1972년부터 저희 집에서 한글 교육을 시작했어요. 한국에서 미리 초등학교 교과서 6년 치를 구해서 두 벌씩 배로 실어 보냈고, 저희 아이들과 교민 자녀들에게 직접 수업을 했습니다.

네덜란드 학교는 보통 수요일 오후에 수업이 없기 때문에 수요일 오후 시간이나 토요일을 활용해 공부 시간을 확보했고, 유학생 목사 교사의 댁, 동네 학교 교실, 교회 주일학교 등으로 공간을 옮겨가며 계속 가르쳤습니다. 나중에는 정식 학교로 출범했고, 제가 초대 교장을 맡게 되었죠.

지금은 K-컬처 덕분에 외국인 학생들도 많습니다. 암스테르담 한글학교에 다니는 300여 명의 학생 중 절반이 현지인입니다. 언어는 단지 소통의 도구가 아닙니다. 정체성과 역사를 지키는 방패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글학교의 존재는 한민족의 정신을 지켜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국어 교육 필요성을 “모국어는 평생 필요한 모유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좌)이준열사박물관 YI JUN PEACE MUSEUM (우)국제사법재판소(ICJ)가 위치한 네덜란드 평화궁 


Q. 해외에서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활동을 하며 특별히 느끼는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있으실까요?
 저에게는 두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는 헤이그의 이준열사기념관이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하우스처럼 발전하는 것입니다. 안네 하우스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해요. 3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죠. 안네 하우스는 안네의 일기장과 콘텐츠가 있어요. 안네가 숨었던 다락방, 일기장에 등장하는 돌밤나무 등을 직접 보기 위해 아이들도 찾아오지요. 콘텐츠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600만 유대인 학살의 비극적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전 세계의 유대인들과 독일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준열사박물관은 그만한 콘텐츠가 부족하고,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찾기에는 지리적 여건도 힘들긴 하지요. 

얼마 전 라이덴 대학에 교환 학생으로 와 있는 동경대학교 사학과 학생이 방문했는데, 일본인들이 학교에서 이 역사를 전혀 배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가르치질 않으니까요. 이준열사박물관이 더욱 많이 알려져서 방문객이 늘어나고,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합니다. 

두 번째로는, ‘법과 평화의 도시’인 헤이그에 국제재판소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국제사법재판소(ICJ,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한국인 재판관이 오셔서 활약하는 게 저의 소원입니다. 국제형사재판소(ICC, International Court of Ciminals), 국제중재재판소(PCA, Permanent Court of Arbitration),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Former Yugoslavia and Croatian War Criminals)에는 한국인 재판관이 오셔서 소장, 재판관으로 활약하고 가시거나 현재 계신 분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ICJ 재판관은 배출되지 않았습니다. ICJ에 한국인 재판관이 오신다면 국위 국격이 올라가고 국력을 따라서 인정받는 것이지요. 특히 이준 열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1895)였기 때문일까요?


1962년 졸업 당시 송창주 동문 


Q. 이화여대 학창 시절에 대해 어떤 추억이 있으신지요?
 저는 1958년에 이화여대 문리대 가정학과(가사과)에 입학했고, 이후 석사 과정까지 공부했습니다. 거의 매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어요. 아마 제가 미스 모리스 장학금을 제일 많이 받은 학생일 거예요. 고맙게도 그렇게 이화에 많은 빚을 지고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남다른 빚진 자의 마음 가득합니다. 

제가 대학원에 입학할 때에는 전 학과의 정원이 크게 축소됐어요. 같이 입학한 동기들이 21명이어서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선생님을 도와서 학교 행사나 회의를 지원하기도 하고, 그런 추억과 기억이 있습니다. 

한편, 대학 때 4.19를, 대학원 때 5.16을 겪기도 해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세대였습니다. 


Q. 마지막으로 후배 이화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저는 후배 여러분께 단 하나의 단어를 남기고 싶습니다. 바로 ‘집요함’입니다.

자기 길을 찾고, 그 길을 끝까지 집요하게 걸어가 보세요. 조금 부족해도, 남들보다 뒤쳐져도 괜찮습니다. 조금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어쨌든 내가 정한 일을 집요하게 하다 보면 나중에 “잘했구나, 잘 됐네”하고 마치게 될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가 오늘날 이렇게 훌륭한 인물로 기억된 이유도, 신봉조 이화여고 첫 한국인 교장선생님이 그녀를 ‘집요하게’ 조명하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유관순이 그 많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누구보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누군가가 집요하게 기억하고 사실을 찾아 기록하고, 행동했던 배경이 있습니다. 

이화의 후배 여러분도 집요하고 단단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