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 최연소국제심판 홍은아(체육·03년 졸)
- 등록일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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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축제, 올림픽 개막이 바야흐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저마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기 종목은 다르겠지만, 여자 축구 경기를 조금 눈여겨보자. 국가 대 국가, 양 팀의 승패를 가르는 뜨거운 그라운드 한 가운데에 휘슬과 레드, 옐로카드를 들고 달리는 이화인이 있다. 남녀를 통틀어 홍은아 동문(체육학과, 03년 졸)이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축구 주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The Ewha에서 홍은아 국제 심판을 먼저 만났다.
홍은아 국제심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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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런던 올림픽 주심을 맡게 됐다. 소감이 어떤가?
올림픽은 스포츠와 관계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특별한 의미를 준다. 특히 영국은 박사 과정을 밟은 곳이고, 2010년 여자 FA컵 결승전에 주심으로 선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해서 더 설렌다. 런던 올림픽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는 생각에 부담감도 있지만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연속으로 올림픽 주심으로 참여할 수 있게 돼 영광스럽다.
'최연소 국제 심판’이라는 흔치않은 타이틀을 갖고 있다. 2003년 1월 국제 심판으로 최종 승인됐다. 중학생 시절 막연히 생각한 국제 심판의 꿈은 대학 입학이 결정된 후, 국제 심판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서 구체화됐다. 1학년 시절부터 국제 심판이 되는 것을 목표로 준비를 시작했다. 기간은 2003년으로 정해두고. 어려서 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목표가 뚜렷해서 차근차근 준비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여자 심판이 많이 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몇 명밖에 없었다. 내가 목표로 한 시기에 국제 심판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최종 결정이 소식을 들었을 때, 더욱 뿌듯했다. 목표를 세우고 준비를 하면 목표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최연소, 비선수 출신, 여자라는 게 난관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그랬나? 우리나라에서는 심판이 선수 출신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 같은 외국에서는 선수, 비선수 출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심판을 언제 시작했는지, 경력이 얼마나 됐는지를 더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심판이 25살이라고 하더라도 14살에 시작했으면 11년의 경력을 인정해주는 거다. |
심판의 매력은 무엇인가?
중학교 3학년 때 미국 월드컵이 열렸다. 우리나라와 스페인이 맞붙었다. 홍명보 선수와 서정원 선수의 활약으로 전 국민이 환호했던 바로 그 경기였다. 그때 카펫처럼 펼쳐진 초록색 그라운드 위를 달리면서 경기를 리드하는 주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축구 심판의 꿈을 키웠던 것 같다.
심판이 되어 그라운드를 직접 달려보니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매력을 느끼게 됐다. 말로는 쉽게 설명이 안 되는데…. 경기장에서 판정을 내리는 순간순간이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경기 중에는 옳은 판정을 내리고 경기를 깔끔하게 마치고 나왔을 때 느껴지는 희열이 있다. 특히 어드밴티지를 주었는데, 그 기회가 살아서 득점으로 이어질 때의 희열은 스트라이커가 찬 공이 골인으로 이어졌을 때 느끼는 희열과 비슷할 것 같다. 경기를 잘 이끌어서 선수들도 경기에 집중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어도 보람을 느낀다.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나?
런던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같은 질문을 받으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 2010년 영국에서 열린 여자 FA컵 결승전, 이 두 경기를 꼽고 싶다. 물론 모든 경기가 중요하지만, 올림픽 준결승 경기에 섰다는 것 자체로 큰 성과였고, 경기 후에 좋은 평가를 받아 보람도 느꼈다. 그리고 FA컵 결승전은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주심을 맡은 경기였다. 축구 종주국에서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니 더욱 영광이었다.
경기에 임할 때나 판정하기 어려운 순간에 나만의 기준 같은 것이 있는지.
심판으로서 공정하게 판정해야 하는 것! 이건 아주 기본적인 거다. (웃음) 그리고 내 눈으로 본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기를 운영할 때 판정하기 어려운 상황은 매번 있다. 비디오로도 판독이 되지 않는 애매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심판은 절대 추측을 하면 안 된다. 그 순간에는 내가 본 걸 믿고 판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쉽지는 않지만, 경기를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슬럼프를 경험한 적이 있나?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슬럼프는 수시로 오는 것 같다. 내가 목표로 하던 대회나 경기에 외부의 변수로 인해 내 손에서 벗어나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고비들도 있지만, 심판이 아닌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 외에 어려움이 있다면, 심판은 비난을 듣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심리적으로 컨트롤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실제로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심판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럴 거다. 한 귀로 흘려버리라고 하는데, 막상 험한 말을 듣고 보면 그게 쉽지만은 않다. 모욕감도 느낀다.
사실 극복하는 방법은 경험하면서 내성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얼마나 이 일을 원해왔고,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이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거다. 비난을 듣지 않고 심판을 계속 한다는 건 정말 불가능하다. 선수들이 그런 행위를 하면 제재를 가할 수 있지만, 관중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다른 선배 심판에게 조언구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이겨나가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이겨나간다는 것도 욕설을 듣고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고, 단지 회복되는 기간이 빨라지는 것이지만.
대학 생활은 어땠나? 이화에서 얻은 자산이 있는지.
1학년 갓 입학하고 나서는 우선 체력관리를 했다. 그리고 1학년 겨울부터 심판 교육 과정을 들었다. 학교 공부, 심판 공부를 병행했다. 심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처음 심판 교육 과정이 있었을 때, 수업과 겹쳐서 4, 5일 정도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빠진 적이 있지만, 그 후에는 학교를 빠지지 않고 다녔다.
그리고 다른 활동들을 많이 했다. 테니스 동아리, 재즈댄스 동아리 활동을 했고, 교환학생으로 영국 리버풀의 호프대학에 다녀오기도 했다. 교환학생으로 영국을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되어 박사학위 과정도 영국으로 가게 됐다. 학창시절의 경험들은 이렇게 인생의 순간순간에 드러나게 된다. |
이화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린다.
나는 실패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대학생 때, 무언가를 시도해서 잘 안 되더라도 누구도 그걸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난관은 실패가 아니라 경험일 뿐이다. 나도 학생이었을 때, 심판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하려고 했다. 또 그게 많이 도움이 되었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 보고, 그 중에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가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꿈을 크고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 출처 : 이화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