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북미주에서 반가운 손님이 이화를 방문했다. 3년 전 어머니의 성함으로 장학금 1억원을 기부했던 그녀는 3년이 지난 후에 모교를 찾아와 또다시 4억원이라는 큰 금액을 쾌척했다. 바로 유정선 동문(정외 58년 졸)의 이야기다. 그녀가 이렇게 큰 금액을 선뜻 기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친정어머니인 故 서현자 동문의 삶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학교에 장학금을 내고 싶어 하셨어요. 진작 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이화를 사랑하셨던 어머니의 뜻과 삶을 기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번 인터뷰가 본인의 기부보다는 삶이 곧 나눔 그 자체였던 어머니 서현자 동문의 삶을 조망하는 기회가 되기를 원했다.
어머니 서현자 동문은 이화학당 유치원 사범과를 1927년에 졸업했다. 딸 유정선 동문과 본교 조형예술대학 유현정 교수를 비롯한 손녀들도 이화 출신이어 3대 이화가족을 이루었다. 서 동문은 유아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나 실습생 경험 외에 교사의 기회는 갖지 못하고 일찍 결혼했다. 그토록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기에,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후배들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대단했다. 돈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명이라도 더 공부할 수 있게 만들자는 생각은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왔다. 어머니는 “없는 사람들이 공부를 하면 더 잘될 수 있는데.....”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한다.
서현자 동문은 이화학당 유치원 사범과 동창들과 그 후에 발전된 이화여전,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선후배들을 잇는 최초의 동창회를 만들어 초기 회장직을 맡았다. 이 동창회는 ‘이우회’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존속되었다. 서 동문은 동창회장직 임기 동안 유아교육과 학생을 위한 장학금 모금을 위해 온몸으로 나섰다. 1960년대 당시에 이화 유치원 장소를 빌려 입학시험을 치르곤 했었는데, 시험을 치르러 온 입시생들을 상대로 따뜻한 국밥을 손수 끓여서 팔았고 그 수익금으로 장학기금을 마련했다. 이 일을 해마다 앞장서 추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창회를 위해 수고하는 임원진들을 때때로 집으로 초대해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 동창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평생을 다 주고 사신 분이에요. 가족에게는 다정다감하기보다 약간 엄한 분이셨는데 남들에게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퍼주셨어요.” 유 동문의 집에는 유독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다. 아버지가 평생 야당 국회의원을 지내신 까닭에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우리집에는 뭐 갖고 오는 사람은 없고 다들 달라는 사람만 오냐고 어머니한테 불평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어머니는 그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대접해 주시고 손에 뭔가를 꼭 들려 보내곤 하셨어요. 아버지가 4선 의원이셨는데 선거 때 우리 어머니 보고 찍는다는 사람이 많았어요. 오히려 어머니 표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었다니까요.” 남들에게 받는 것도 없이 항상 베풀기만 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시절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 딸은 어머니를 그대로 본받고 있었다.
유정선 동문은 어머니가 이토록 한결 같이 평생을 베풀다 가신 것은 기독교 신앙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던 남편과 시부모님을 차례로 전도했고, 시누이와 시동생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100명이 넘는 유씨 일가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 시부모님께 예를 다했고, 시동생들 뒷바라지까지 싫은 내색 한번을 안 하며 기쁨으로 섬긴 어머니의 삶이 모두를 감동시킨 것이다. 친구들에게서 “현자는 이름 그대로 현자(賢者)란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주변인들에게도 언제나 존경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90평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한 일이 없어서 부끄럽다. 오직 자녀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이 민족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내 소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초창기 이화에서 받은 교육과 기독교 정신은 어머니의 삶에 아름답게 스며들었고, 후대가 그 삶을 본받아 실천하고 있었다. 대를 이어져 오는 이화의 가르침이 세상에 아름다운 물결을 그리며 퍼져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