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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계] 빈민아동의 대모, 국회의원 강명순(시청각교육, 74년 졸)

  • 등록일2015.03.17
  • 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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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서명을 한 번 본 사람은 쉽게 잊지 못한다. 자신의 이름(강명순) 각 음절의 초성으로 강과 들과 산을 형상화한 그녀의 사인은 산과 들과 강으로 뛰어다니는 장난기 많은 소년의 얼굴을 닮았다.

17일 의원회관에서 만난 강 의원의 분위기도 본인의 서명과 비슷했다. 그녀는 ‘굶고 매 맞고 왕따 당하는 아이들의 왕엄마’로 살아온 38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쾌활하고 밝았다. 늘 낮은 곳으로 임했던 예수도 고품격 유머를 구사하는 개구쟁이였다는 어느 목회자의 글이 생각난다. 확실히 그녀에겐 ‘빈민운동의 대모’라는 수식어보다는 ‘배고프고 아픈 이들의 친구’라는 별칭이 어울렸다.

The Ewha의 3호 테마는 ‘나눔’이다. 평생을 빈곤·결식아동과 함께 살면서 ‘나눔’을 온 몸으로 실천해왔고, 지난 2008년엔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정계에 입문, 빈곤아동을 넘어 노숙자·알코올중독자 등 소외계층 전체를 위해 ‘더 큰 우산’으로 살고 있는 강명순 의원에게 지난 삶의 이야기와 근황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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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 안, LOVE 모양의 구름사진이 담긴 액자를 보며) 이건 합성사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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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남편과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찍은 것이다. 오랫동안 기도하며 빈민사역을 해 온 저희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미소 같아서 사라지기 전에 얼른 찍어두었다. 취미가 사진찍기와 책 만들기다.

 

방 곳곳에서 그녀가 손수 찍은 사진들과 손 글씨가 어우러진 인쇄물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글이 소외되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 그녀는 ‘부스러기사랑나눔회’를 이끌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일상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내곤 했다.

 

‘교회 방치아동 탁아소 운영 지침서’ 같은 것이 그것이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자료들 속에 빈곤문제에 대한 선지자적 통찰이, 성경 속에서 사회복지운동의 근거와 아이디어를 얻으려는 신앙인으로서의 정성어린 시도들이 읽힌다. 

The Ewha  빈민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시절 이화사회교육위원회(현 사회봉사센터의 전신), 기독학생회 등을 통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대학은 ‘유신방학’이다, ‘계엄령 방학’이다 해서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방학이 많아 자연히 학교 바깥 활동을 많이 했다. 그때 나는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다가 새문안교회 대학부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3학년 말에 창동 빈민지역으로 봉사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그것이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닭장집이라고 들어보았는지? 화장실은 없고 서너 평도 안 되는 방한 칸에 작은 부엌이 딸린 그런 공간이 닭장처럼 붙어있는 동네였다. 주거 환경이 상당히 열악한 가운데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이 내 손가락에 한명씩 매달려서 나를 따르는데, 그때 기적을 만난 것 같다. 그들의 열렬한 사랑 나눔 몸짓에 나는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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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원래부터 신앙이 남달랐나?

대학 입학 당시엔 신앙이 없었다. 마음이 산란할 땐 이대 뒷산의 낡은 판잣집 초소에서 하모니카를 불거나, 여러 개의 둥근 통나무들이 의자처럼 놓여있는 ‘팔복동산’에서 기도 대신 생각에 잠기곤 했다.

당시의 그런 방황과 외로움을 치료해주었던 묘약이 이화의 채플이었다. 당시 서광선, 현영학 교수님 같은 분들의 설교가 너무 좋았다. 서 교수님은 암울한 시대에 현실과 맞서 싸우는 나를 보고 질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는 이 시대의 청량제처럼 용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담은 편지를 보내주셨다. 두 분의 사랑과 가르침이 나의 삶을 산동네 갈릴리로 향하도록 인도했다. 

채플을 듣기만 했던 학생시절을 지나 졸업 후 빈민사역을 하는 목사의 입장에서 채플에 몇 번 참가했다. 손운산 교목님 말씀이 내가 ‘채플 최다 출연 명사’라고 하시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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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변소에 문짝도 없는 판자촌 단칸방’에서 남편 정명기 목사와 신혼 겸 본격적인 빈민사역을 시작했다. 힘든 환경에서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장 큰 원동력은 기도와 믿음이다. 같은 길을 걷는 남편도 큰 힘이 됐다. 배우자가 욕심이 많거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한 길을 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생각이 잘 맞았지만 부부로 살면서 더 닮아간 것 같다.

둘 다 근검절약이 몸에 뱄다. 옷과 신발은 한 벌 사면 떨어질 때 까지 입고 물건에 대한 소유욕도 거의 없다. 빈민봉사나 목회활동을 하다보면 상처받을 일도 많은데 서로를 100%, 아니 200% 이해하고 지지하며 살아왔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되지 않지만(웃음) 우리는 서로 수박이라고 ‘착각’하며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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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정명기 목사께서 “나는 아내와 함께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내는 그마저도 사치로 생각한다”며 아쉬워하는 글을 봤다. 

성격상 워낙 강직한 면이 있다. 오랫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나한테 돈쓰면 죄 짓는 기분이 든다.

사당동 판잣집 시절, 한번은 시어른이 쇠고기를 사가지고 신혼집에 들르셨는데 적은 양이라 이웃에게 나눠줄 수가 없어서 우리만 쇠고기를 구워먹었다. 맘에 부담을 가지고 먹다가 결국 신경성대장염에 걸려 고생했다. 안 먹는 게 차라리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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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상대였던 이웃이 인간적인 실망감을 줄 때 어떻게 극복했나? 

실망하면 화내면 되지. 화내다가 울고 기도하고. 내가 좀 단순하다(웃음).

부스러기선교회(부스러기사랑나눔회의 전신) 시절 조직차원에서 도와주고, 그것도 모자라 개인적으로도 딸 아이 돌 반지까지 팔아서 도와주었는데도 더 도와주지 않는다고 뒷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여러 번 배신감과 혼돈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국엔 “가난한 사람들이 죄짓게 할 수 없도록 이 땅에서 가난을 걷어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인간관계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울다보면 왜 이렇게 힘겨운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되고,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에 대해 겸손해지면 모든 게 다 쉬워진다. 제일 마지막은 자기한테 까다로운데 그것까지 해결하게 되니까 기다릴 줄 알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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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되셨지만 하시는 활동은 이전 부스러기시절의 연장선이 아닌가 싶다. 임기의 절반이 지난 지금, 달라진 점은? 

처음 비례대표 제안을 받았을 때 두려움이 많았지만, 빈민 아동들을 위해 정책 하나를 세우면 많은 아이들에게 기회가 돌아갈 거란 주변의 권면을 받아들여 오늘까지 왔다. 야밤이나 비오는 날 철거민들의 보금자리를 허무는 일을 못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지역아동센터의 지원금을 늘린 것, 마이크로 크레디트 관련법 통과 등을 성과라고 생각한다. 빈곤퇴치연구포럼, 빈곤 없는 나라 만드는 특별위원회(빈나특위)를 통해 빈곤문제에 대한 동료의원들의 관심과 조력을 이끌고 있다. 그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미지3 The Ewha  인터뷰를 준비하던 중 자료 확인 차 ‘부스러기사랑나눔회’와 통화했는데 의원님의 긍정적이고 유쾌한 기운을 활동가들도 나눠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 
1986년 계좌에 달랑 천원을 넣어놓고, 지인들에게 어려운 사정에 처한 아이들을 돕는 일에 동참해달라고 편지를 직접 써서 보낸 것이 ‘부스러기’의 시작이다. 마음을 열고 우리의 얘기를 들어준 후원자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부스러기’는 없었을 것이다. 
말은 마음을 여는 열쇠다. 나는 부스러기 동역자들에게 늘 전화를 받을 때 ‘도’음보다는 ‘미’나 ‘솔’음으로 톤을 유지하라고 얘기한다. 빈곤아동을 돕고 후원자를 모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어둡고 우울하지 않고 사랑을 나눠서 즐겁고 기쁘다는 모델을 보여줘야 그 말을 듣는 사람들도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The Ewha  따님 두 분 모두 결혼하셔서 사위까지 6명의 가족 중에 4명이 목사, 두 명이 전도사에 5명이 사회복지사라는 얘길 들었다. 

항상 가족 모임이 사회복지와 목회 이슈를 다루는 워크숍 같다(웃음). 삶과 일이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섞이니 축복이다. 잘 자라준 딸들에게도 감사하다. ‘일등해라, 공부 잘해라’ 가르치지 않고 학교 가는 아이에게 잘 놀다 오라고 말할 정도로 친구처럼 대했던 나의 양육방식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부모가 솔선해서 자연과 이웃을 아끼는 삶을 살면 같이 사는 아이들도 연기가 스며들듯 훈습되어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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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순 의원에게 ‘나눔’이란 어떤 의미인가?

삶 그 자체. 특별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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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나눔’을 꿈꾸는 이화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 땅엔 여전히 빈곤하고 불우한 사람이 너무 많고, 그들의 불행은 당사자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메랑으로 사회 구성원에게 돌아오게 돼 있다. 나눔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이유다. 쓰고 남은 것을 남 주는 건 나눔이 아니다. 진정한 나눔은 자기가 써야 하는 데 안 쓰고 더 위급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맨 몸으로 왔다.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 과연 나의 것일까? 기독교인이라면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몫이므로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가 후천적으로 가진 물질이나 지식, 학벌 등을 모두 온전한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남 주기 아깝고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두 손에 자기 것을 움켜쥐면 두 가지 밖에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빈손이면 사람들이 주는 수백만 가지를 다 받을 수 있다. 빈손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랄까. 우리 후배들도 그 깨달음을 빨리 알았으면 좋겠다.

 

│글·편집 이화여대 홍보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