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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여성 최초 대형 로펌 대표변호사, 이영희 동문

  • 등록일2022.03.25
  • 7463

이화는 1950년 법률학과 설치를 시작으로, 1996년 세계 최초 여자 법과대학 설립, 2009년 세계 최초의 여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개원을 이어가며 수많은 여성 법조인을 배출해왔는데요. 오늘 이화투데이는 최초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자랑스러운 이화 동문을 만나보았습니다. 바로 여성 최초로 대형 로펌 대표 변호사직에 선출된 법무법인 바른 이영희 동문(법학·94년졸)인데요. 최초의 길을 걸어가는 이영희 변호사 님의 경험담, 그리고 20년 전 이화 캠퍼스를 누비던 '이대 5인방' 에피소드까지! 모두 놓치지 마세요.



Q. 안녕하세요, 동문님.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화여대 법학과 90학번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94년 졸업 후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97년에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사법연수원 29기로 졸업해 바로 법무법인바른 의 공채 1기로 입사를 해서 지금까지 23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2000년에 입사 후 2011년 파트너로 승진을 했고, 2018년에는 바른의 이사진인 운영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번에 바른의 경영 대표로 선출되었어요. 


Q. 여성 최초 대형 로펌 대표변호사 선출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부탁드립니다.

우선 감사합니다. 그리고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낍니다. 바른의 대표 변호사는 모든 파트너 변호사님들의 선거로 선출되는 구조입니다. 저를 믿고 그리고 또 뽑아주신 것에 상당히 감사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죠. 그다음 드는 생각으로는 신뢰해 주셨으니까 그 신뢰에 부응해야 된다는 그런 부담이 또 있습니다. 여성 최초로 대형 로펌의 여자 변호사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생각이 들죠. 기존의 남자 변호사님들이 뭘 약간 실수를 하거나 뭘 못했다면 개인의 그냥 문제라고 치부를 하는데, 저의 경우에는 이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 게 아니라 “그래 여자 변호사가 대표가 되니 저런 일이 있어” 이런 시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대표 변호사님들하고는 달리 부담감이 좀 큰 것 같습니다. 제가 계속 잘해야 후배들이 대형 로펌에서 운영위원이나 임원진, 대표로 계속 성장할 수 있을 텐데, 혹시 제가 잘못하면 그것이 다른 분들의 앞길을 막지 않을까 또 다른 안 좋은 편견이나 시각을 주지 않을까라는 부담감이 사실 있습니다. 반대로, 만약에 제가 잘 해내면 좋은 선례가 될 수도 있고 여성 인재들이 많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그런 기대감도 있고요. 


Q. 경영 대표 변호사는 무슨 일을 하나요?

바른에는 1명의 총괄대표변호사와 2명의 경영대표변호사가 있습니다. 총괄 대표는 법인 전체를 대표하고 관할하고, 경영대표는 총괄대표를 보좌해서 법인의 재무, 회계, 홍보, 인사, 노무, 조직관리, 부분을 담당하게 됩니다. 제가 맡은 파트는 인사 및 조직 관리 파트로, 변호사와 직원들의 채용과 승진 같은 일을 관장하게 되죠. 아무래도 법인에 많은 파트너 변호사님들이 계시다 보니 이해가 상충되는 경우도 상당히 있습니다. 그런 케이스들을 잘 조율해서 발전적인 방향을 제안하고 합의도 이끌어 내고, 또 어떠한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법무법인 바른 4차산업대응팀과 함께 | 법무법인 바른-싱가폴QWP로펌 업무 제휴식에서


Q. 동문 님의 어떤 역량이 대표 변호사가 되는데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을 받고 저보다는 저를 뽑아주신 분들이 더 잘 알지 싶어서 한번 여쭈어봤는데요. 구성원 간 공감 능력이 좋고, 소통을 잘하는 부분이 저를 대표로 뽑아주신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다른 사람 얘기들을 많이 경청하는 성향이 있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함께 고민해 주는 경향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또 제가 바른에 들어온 지 20년이 넘었는데, 들어온 순서로 하면 넘버 포입니다. (웃음) 오랫동안 많은 변호사분들, 직원분들을 겪으며 그분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고, 그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쭉 봐왔기 때문에 조직이나 인사 관리를 하는 데 있어서 적절하다고 보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Q. 변호사로서 힘들었던 점과 극복하신 방법이 궁금합니다.

변호사로서 송무 파트를 담당했습니다. '송무'라는 건 민사의 경우에는 원고나 피고를 대리해서 법률적 주장을 하는 일입니다. 재판에는 늘 결과가 있는 것이라 항상 그에 따른 희비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요. 법원에 의해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 또는 이 사람이 유죄인지 무죄인지가 결정되는 승패가 있는 업무거든요. 클라이언트와 충분히 대화하고 공감해서 '이 부분은 우리 클라이언트의 말이 맞다'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법원에서 제3자가 판단하기에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을 때, 의뢰인의 무죄를 확신했는데 유죄를 받는다거나 하는 등 결과가 좋지 않을 때 힘들죠. 아마도 송무 변호사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의뢰인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선임했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뭔가 놓친 게 무엇일까?' '내가 좀 설득하지 못한 게 무엇인가?' 이런 고민들로 굉장히 힘들어요. 특히 열정과 애정을 가졌던 사건일수록 그 후유증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변호사를 오래 하다 보면, 단순히 그 사건만 보는 게 아니라 사건 이면에 있는 것들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 사건이 미칠 파급 효과 혹은 후속되는 일들의 기회비용 등등. 실제로 보면 소송에 이겨서 더 괴로운 경우도 많이 있어요. 예측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소송들이 추가적으로 발생되는 경우도 있고요. 그동안 많은 소송을 하면서 만나게 된 클라이언트들과 지금까지도 안부를 전하기도 하고, 관계도 지속적으로 연락하면서 그분들의 삶을 지켜보는데, 소송에서 진 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 끝은 아니었어요. 하나의 과정일 뿐이고, 그 과정에서 졌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훨씬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차라리 그때 져서 그렇게 정리되는 게 나은 것 같다"라고 얘기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래서 저는 클라이언트분들에게 제가 한 케이스들 중 이런 경우도 있었으니 다른 방향으로 가보자고 양보하고 조정하는 것을 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제는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겠죠. 그분이 지금 겪는 고통이 남은 인생에 좀 더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성장하게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기도요. 


Q. 반대로 보람찼던 경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찾아오시는 의뢰인분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본인의 전 재산을 건 소송 1심에서 법률적으로 잘못돼서 퇴직금으로 투자한 전 재산을 날려야 되는 상황 같은 경우죠. 그런 사건을 저희가 항소심에서 잘 풀어서 유리한 판결을 받았을 때 "정말 고맙다"라고 말씀해 주시며 눈물 흘리던 의뢰인 분들을 볼 때 가장 보람찼어요. 물론 보상을 받고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일을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죠. 그뿐만 아니라 형사사건에서 무죄를 주장해서 무죄를 받는 것만큼 보람찬 게 없습니다. 


Q. 앞으로의 커리어적 목표가 궁금합니다.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변호사님들뿐만 아니라 많은 직원분들이 아침에 눈을 떠서 출근하는 것이 괴롭지 않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오는 조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며 우리 회사도 오프라인 회의나 모임 등을 제한하고 있다 보니, 변호사님들이 답답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토론하거나 상의할 수 있는 부분이 예전보다는 많이 없다고 하시는데, 업무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 물어보거나 하는 것도 좀 친해져야 가능한 거잖아요. 그런 부분이 좀 안타까웠거든요. 우리가 여기서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 조금 추상적이고 낭만적이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 관심과 애정을 갖고 그 사람을 지켜봐 주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회사에 들어오실 때 보셨겠지만 1층에 계시는 경비원분들을 비롯해 회사에 정말 다양한 분들이 일하고 계신데 그분들 모두가 바른에 몸담고 있는 가족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임금이나 이런 것을 떠나 본인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현대사회가 회사에서 남은 시간에 집에 가 있는 구조이다 보니까, 이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분들에게 마지못해 있는 장소가 아니라 조금 더 기쁘고 출근하는 게 즐거운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다르다, 따뜻하다' 이런 조직 문화를 좀 만들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것을 굉장히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매 순간 아주 작은 일에 감사하기 시작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침에 일어나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안아줄 수 있는 가족들이 제 옆에 있는 것이 행복하고, 사무실에 와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이 행복하고, 또 일하면서 만나는 동료들과 어려운 일을 상의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느낌을 구성원 모두가 가지면 좋겠다, 나아가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Q. 대학시절의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당시 법대에는 고시반이 있었는데, 97년도에 이대 법대 90학번이 5명 합격했어요. 이전까지 같은 학번에서 동시에 그렇게 많이 합격한 적이 없어서, 저희 다섯 명을 ‘이대 5인방’이라고 했어요. (웃음) 보통 1차 시험에 붙으면 2차 시험 대비 스터디 팀을 짜거든요. 다른 학교 사람들과 스터디를 하는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엄청 서러움과 무시를 당한다는 거예요. 저희 다섯 명은 "우리가 스터디 팀을 만들면 되지!" 하고 저희가 주도해 스터디 팀을 만들었어요. 1차는 학교에서 다 공부를 해서 다 같이 합격하고, 2차를 신림동 고시촌에서 준비했어요. 저희가 신림동에서 유명했는데, 여자 다섯 명이 뭉쳐 다니고 또 엄청 시끄럽고 엄청 많이 먹고 그래서 '이대 5인방'이라는 별명이 붙게 됐어요. 저희 다섯 명에다가 타대생 세 분이 합류해서 총 여덟 명이 스터디 팀을 꾸렸는데, 저희가 중심이 돼서 각 과목마다 지도 선생님을 초청했어요. 각 과목마다 잘 하는 분께 가서 저희를 지도해달라고 부탁드렸죠. 그렇게 해서 전원이 다 합격을 했어요. 그 여덟 명이 함께 공부했던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외국을 간 친구를 제외하고 나머지 이대 4인방은 자주 봅니다.

학교 다닐 때는 고시실 뒤 팔복동산에서 우리가 미래에 뭐가 될 수 있을지,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다들 불투명한 미래가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게 서로에게 격려가 되었어요. '같이 있다'라는 거. 우리 같이 불안한 미래를 안고 같이 있다는 것이요. 또 졸업해서도 1차 붙을 때까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졸업하고 갈 데도 없는데 학교에 나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잖아요. 학교에서 송덕수 교수님 같은 분들이 고시도 지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셨어요. 또 익숙한 데서 공부하는 게 제일 좋잖아요. 그런 부분들이 많이 좋았습니다. 


Q. 이화가 동문 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해요. 

요즘 학교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는데 저희 때만 하더라도 서울에 있는 웬만한 대학, 그중에 특히 법대는 여학생의 수가 지극히 적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전원 여학생이라서, 축제라든가 무슨 활동을 한다고 하면 전부 다 여자가 주체가 돼요. 그 4년 동안 난관에 부딪히면 남자의 도움이 없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 우리끼리 고민하고 상의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그게 우리 몸속에 DNA로 박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사회에 나와서 보니 남녀공학에서 오신 분들보다 이대 출신들이 훨씬 자주적이고 독립적이고, 뭔가를 할 때 뒤로 물러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어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이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누구의 도움을 받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풀어나갈지를 고민했던 것들이 상당히 저희한테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각종 분야에서 리더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간혹 농담하실 때 "이대 출신들은 자기주장이 강해" 이런 말들을 하세요. 저는 그것이 이화의 문화라고 생각을 해요. 저희는 잘못된 걸 가만히 보고 있는 성격들이 아니잖아요. "왜 그래야 됩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는 경향이 있어요. 사실 우리는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인간 대 인간'으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학교를 다니는 4년 동안 그 갈등을 풀어가는 방법에 익숙해졌고, 어떻게 여성과 소통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희 사무실은 여성 변호사가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이 후배들하고 대화를 할지에 대한 부분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연습들을 이화에서 할 수 있었죠. 어떻게 양보하고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되고 이런 부분들은 철저하게 연습되어 있는 것 같아요. 


Q. 동문 님이 바라는 이화의 미래 그리고 이화인의 미래는 무엇인가요?

어느 총장님의 취임식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여자 대학”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이게 제가 추구하는 이화의 미래입니다. 여자 대학이 과연 필요하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고, 로스쿨 만들 때 왜 여자 대학에 티켓을 줘야 되느냐고 말이 많았잖아요. 근데 분명히 가치가 있거든요. 졸업을 하고 나와서 살면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대를 다니면서 체득한 여러 가지 DNA가 우리가 도전을 하거나 무언가를 추진하는 데 있어 밑바탕이 되어준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정말 암울했던 여성의 인권이나 가족법에서의 열악한 여성의 지위를 개선하거나, 통념이나 금기를 깨는 일들은 다 우리 학교 선배님들이 해오신 거잖아요. 

지금도 옛날보다는 많이 발전했지만,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할지는 또 다른 과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젠더와 관련해 왜곡된 것들이 많은데 저는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가진 여성 인재들을 키워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녀가 적대적인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기보다는 서로 공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저희 학교만큼 관심 있게 보고 많은 노력과 실험을 하는 곳은 없다고 봐요. 다음 세대는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이런 부분을 많이 연구를 해줘서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여자 대학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화를 나온 사람들은 합리적인 가치관과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정신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선배님들이 굉장히 자랑스러웠어요.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깨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요. 졸업생으로서 그러한 선배님들의 영향력을 실천하고 싶고, 그걸 우리 후배들이 이어받아 훨씬 더 많은 영역으로 개척해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뜻하지만 진지하고, 진취적이지만 낭만적이었던 이영희 동문님과의 인터뷰였습니다. '최초'라는 건 다른 이들보다 그저 한두 걸음 빠르다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길을 만들어 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요. 이화가 이뤄온 최초의 기록과 이화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이영희 동문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번 '최초'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선배님의 영향력을 이어받아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보내는 이화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모든 이화인들의 도전적인 미래를 응원하며, 이상 이투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