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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부 기관 최초 통역사, 임종령 동문

  • 등록일202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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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화에서 배우고 꿈을 키운 많은 이화인들은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 도전과 개척을 실천하며, 최초의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데요. 오늘 이화DNA 인터뷰는 우리나라 정부 최초의 통역사이자 동시통역 분야 1세대로 활동해오신 동시통역사 임종령 동문(영어영문·89년졸)의 스토리를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85학번 임종령입니다. 30년 차 국제회의 통역사이자 현재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학과장과 통번역센터 소장직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91년도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후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서 통번역사를 시작했고, 94년부터는 미대사관에서 통번역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99년 한국외대 통변역대학원에서 한영과 겸임교수와 통번역센터 실장직을 시작하면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통역사를 꿈꾸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브라질 상파울루 외환은행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으셔서 어렸을 때 포르투갈어를 배웠습니다. 학교 수업은 영어였지만 대부분이 남미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의사소통을 도와드리면서 제가 가교 역할을 해서 소통을 돕는다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귀국 후 대학교에 다닐 때 당시 대한체육협회 회장이시던 대우그룹 회장님의 비서였던 친척분의 소개로 FIFA 회장님이 한국 방문했을 때 포르투갈어를 통역해드리기도 했고, '86 아시안게임(탁구)과 '88 아시안게임(수영) 때 심판과 선수를 통역하면서 통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대기업 회장 비서직 오퍼가 들어왔는데, 아버님이 “평생 타인에게 커피를 타줄래 아니면 너 스스로 전문직으로 일할래?"라고 말씀하시며 전문직을 갖기를 적극 추천하셨습니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 비서 업무는 잡무나 일정을 챙기고, 전화받는 역할에 한정된 이미지였거든요. 아버지가 통역대학원 설명 팸플릿과 입시지원서를 가져다주시고, 당시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두껍고 최고인 영한사전을 사다 주시며 적극적으로 독려해 주셔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Q. 정부 기관 제1호 통역사라는 타이틀을 얻은 선배님만의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비결이라기보다는 운이 좋았습니다. 통역대학원 졸업 시험이 막 끝난 시점에 91년 걸프전이 터졌는데 대학원 교수님께서 MBC에 가서 관련 통역을 하라고 추천해 주셨어요. 또 EU 집행위원장님이 상공부와 재무부 등 정부 부처 방문하셨을 때도, 그 후에 정부 부처 중 최초로 상공부가 통역사를 뽑을 때도 교수님의 추천으로 지원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미 통상 협상이 정말 많아서 정부 차원에서도 통역사가 필요했었어요. 실제로 입사해서 정말 거의 매일 지적재산권, 섬유 등 분야별로 돌아가면서 한미 통상 협상 통역을 했고, 반덤핑 제소 등 실무적인 회의 통역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정부 최초이다 보니, 과천에서 통역할 수 있는 인력이 저 혼자였어요. 상공부와 같은 건물을 쓰는 4층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에 내려가서 재무부 쪽 통역도 많이 했고, 옆 건물에 위치한 경제기획원 쪽 통역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세월이 많이 달라져서 주요 정부 부처의 경우에는 핵심 과 단위로 통역사를 고용해, 한 정부 부처에 통역사가 몇 명씩 있습니다.


Q.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한 수많은 정상들의 통역을 담당하셨는데요, 매우 떨리고 긴장되는 상황이었을 거 같아요. 그때의 심정이 궁금합니다!

떨리고 긴장되는 것은 본인의 준비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배경지식과 용어 등을 최대한 많이 준비해서 자신감이 생기면 절대 긴장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내가 완벽하게 준비를 해가면 오히려 그 시간이 재미있고, 지적 호기심이 채워지며 배우는 것도 있어 즐기면서 통역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영국 여왕의 통역은 1주일 전부터 영국 대사관 분들과 모두 같이 다니면서 예행연습을 해 동선을 완벽하게 파악했고, 왕실 분들께 예절 교육도 받는 등 사전 조사와 준비를 완벽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떨리거나 긴장하기보단 일정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다 보니 3박 4일 일정이 어느새 끝나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통역은 언제였나요?

기억에 남는 통역이 너무 많아서 어려운 질문이네요. 주로 실수했던 것이나 힘들었던 것이 더 기억에 남는 듯합니다. 프리랜서가 된 지 얼마 안 되는 90년 말 정부 측 회의에서 통역을 맡았었는데요. 각 정부 대표자들께서 문어체로 된 원고를 읽으며 말씀하시는데, 기밀로 진행되는 회의라 프리랜서, 즉 외부인인 저는 사전에 원고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문어체와 구어체 통역이 다른데, 문어체의 경우 문장 통역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특히, 정부에서 법규 관련해 이야기하면서 정책을 설명하던 회의 첫 시간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결국 쉬는 시간에 한국 측 수석대표에게 전체 원고 달라 요청해 통역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회의 후에 말씀자료를 돌려드리자 기밀 유지가 너무나 중요한 회의라서 그랬다고 하시더군요. 통역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어려웠기에 기억에 남습니다. 한 번은 서울에서 회의 후 다른 지역으로 다 같이 이동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서울 회의가 길어져서 타기로 한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착륙하면서 사고가 났습니다. 회의가 길어져서 목숨을 건졌던 상황이라 생각이 나네요. 

2018년 UN 총회에 대통령님 통역으로 갔을 때입니다. 당시 BTS가 UN 총회 연설을 하는데 연설 전에 참석해서 다른 사람들 연설을 듣는다고 동시통역을 요청해 그 회의장으로 가게 됐어요. 저는 워낙 TV를 볼 시간이 없기도 하고 TV를 잘 보지 않아 BTS 인기를 제대로 몰랐었는데, 나중에 딸들이 난리가 났던 것도 기억에 남네요. (웃음)

또, 가까이 모시고 통역하면서 지식도 많고 현명하시면서 위트가 넘쳐서 존경하고 팬이 된 분이 몇 분 떠오르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몇 분을 소개하자면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부 장관, GE 잭 웰치 회장님, 삼성전자 윤종용 전 부회장님, 안철수 대표님 그리고 특히 이낙연 전 국무총리님입니다. 모두 타인을 배려하고 겸손하시면서 해박한 지식이 가득하신 진정한 현인들이시고,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다 보면 정말 존경심이 우러러 나오게 됩니다. 이분들 말씀을 통역한 순간순간은 제 평생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Q. 통역하시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시는 때는 언제인가요?

항상 보람을 느낍니다. 정확한 의사전달을 해서 기업 간에 무엇인가 성사가 되었을 때, 혹은 주최 측에 도움이 되었을 때, 그리고 회의가 잘 마무리된 걸 느낄 수가 있을 때 뿌듯합니다. 아무래도 주최 측이 좋은 피드백을 줄 때가 제일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니까요. (웃음) 무엇보다 가장 큰 보람은 무언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면서 느끼는 희열이 아닐까 싶습니다.


Q. 영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선배님만의 팁이 있으시다면 궁금합니다!

보통 우리가 영어 생활권에 살면서 매일 영어를 접하지 않기 때문에 영어를 듣고 사용하고 말하는 나만의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매일 영어를 듣고, 말해보고, 외워서 써보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영어 뉴스를 들으면서 입으로 따라 하는 연습을 합니다. 통역대학원에서는 이를 'shadowing'이라고 하는데요. 그리고 좋은 표현을 끊임없이 외우고, 소설도 듣고, 읽고 반복 학습하면서 외우는 것이 최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냥 외우기만 하면 의미가 없고 직접 써봐야 합니다. 제 수업 학생들은 사전을 외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외운 내용으로 직접 통역 연습하는 스터디를 하는데요. 파트너와 같이 영한-한영 통역을 하며 외운 단어를 쓰다 보면 비로소 내 것, 내 표현, 내 재산이 됩니다. 

통역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던 대학교 4학년 때 저도 단어를 너무 몰랐어요. 당시 외국 뉴스는 미군에서 내보내던 AFKN 방송에서 들을 수 있었는데 이해가 안 됐죠. 그래서 서점에 가서 33,000 단어책을 사서 한 권을 다 외워버렸습니다. 한국어와 영어 표현이 부족해서 작문이 어려웠을 때는 영작문 기초, 중급, 고급 이렇게 3단계로 된 책을 샀어요. 한글을 읽고 입으로 영어로 내뱉으며 외워서 3권을 끝냈더니 실력이 향상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많이 듣고, 외우고, 써보는 것을 권장합니다. 요즘에는 Youtube에 좋은 연설 등이 많아서 자주 듣고 있습니다.


Q. 코로나19 이후 언택트 사회로 변하고 있는데 통역 시장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코로나19로 인해서 해외 출장이 모두 중단되었고, 해외 연사들은 거의 대부분 화상으로 연결하여 회의를 합니다. 연사분들이 계시는 곳이 달라서 시차를 고려하여 회의 시간이 오후나 밤늦게 하는 경우도 꽤 많이 생겼습니다. 또한 현장에서 통역하지 않고 통역사들끼리 만나서 둘이서 같이 동시통역을 하거나, 집에서 혼자 순차 통역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영상 파일을 주시고 동시통역을 녹음해 달라고 하시는 경우도 있고, 자막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요청도 많이 늘었습니다.


Q. 최근 방송에서 90장의 이력서가 화제가 되었는데요. 현재의 선배님이 계시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있으셨을 거 같아요! 이러한 모든 일을 해오시면서 힘들고 어려우셨던 적은 없으신가요?

조카 덕분에 TV 출연해서 제 이력서가 우연히 눈에 띄어서 소개되었을 뿐, 저뿐만 아니라 30년 정도 경력이 되시는 분들은 대부분 다들 그 정도 이력이 있으실 것입니다.  

남편과 딸들과 같이 시간을 많이 못 보낼 때가 가장 아쉽죠. 회의 준비를 위해 계속 자료를 읽고 주제 습득을 위해 공부를 하다 보니, 가족과 같이 여유롭게 보내는 시간이 적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딸들이 귀국하는 방학에나마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너무 중요한 회의가 있거나 출장을 반드시 가야 할 때가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작년 초 코로나로 인해 많은 일정이 취소되고 집에만 있었을 때, 남편과 함께 전에 해보지 못한 것들, TV도 같이 시청하고 반려견과 함께 산책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요. 그 시간들이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거 같아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Q. 선배님은 이화에서 어떤 학생이셨나요?

4년간 영문과 반장을 했었어요. 당시 막 부임하신 박승혁 교수님께 과 학생들 단체로 미팅시켜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교수님이 얼마나 황당하셨을지. (웃음) 김세영 교수님의 희곡 강의를 들으면서 셰익스피어 작품들에 빠지기도 하고 윤정옥, 조정호 교수님의 소설 강의를 듣고 영어 소설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들 다들 너무 보고 싶어지네요.


Q. 통역사를 꿈꾸는 이화인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Nothing is impossible if you try hard. 




지금까지 우리나라 대표 동시통역사로서 최초의 길을 걸어오신 임종령 동문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Nothing is impossible if you try hard.”라는 응원의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요. 임종령 동문님의 이야기가 통번역 분야의 진출을 꿈꾸는 이화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이화인들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화투데이 리포터 12기 정경은